첫 녹음


냠냠 레시피 ~ 갈비찜

그저께 어머니께 집안일에 관해 선언하고 나서 처음으로 전수받은 요리.
"갈비찜" (분량은 물론 명절기준인 10~20인분)


재료 : 갈비 한 들통 + 사태살 두주먹,  배 큰 놈 하나, 작은 양파 세 개, 파 한 움큼 단, 오복간장 작은 거 한 병, 깨, 꿀, 키위 약간


(1) 갈비를 물에 30분쯤 담가 핏물을 뺀다.
* 핏물 빼는 동안 갈비 양념 준비 - 배 빼고 나머지 다 갈아서 넣으면 끝.  ㅋㅋㅋㅋ  (배는 따로 갈아서 뱃물과 함께 준비해둠) 

(2) 미지근한 물에 살짝 씻는다.

(3) 들통에 담긴 고기에 뱃물을 붓는다.

(4) 양념장을 붓는다.

하룻밤 재어놨다가 내일 점심부터 먹는다 ....


뭐야. 이렇게 간단한데.... -_-
고기 20만원 어치에 이런 준비 작업을 통해 매년 맛난 갈비를 먹었던 거군... 담 추석엔 직접 해봐야지. 킁

 


 


형사정책의 현실과 모순

 

현재 일본에서 연간 검거되는 200만 명의 범죄자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는 사람은 3만 명 정도이다. 이는 전체의 2%에 불과하지만, 만일 검찰이 조금만 형기의 기준을 낮추어도 순식간에 수천만 명 단위로 교도소 인구는 증가하게 될 것이다. 검찰이 기소하기 전까지 최대한 처벌에 대해 승부를 내야 하므로 검찰을 얼마나 잘 설득하느냐가 변호사들의 기량이 된다.


형사사법 절차는 어느 정도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범죄자 2백만 명 중 대다수가 벌금, 집행유예, 기소유예로 실형을 면하는 가운데, 일정 조건을 못 갖춘 2%의 범죄자만 실형을 선고 받아 교도소로 간다.


실형을 면할 수 있는 조건이란 (초범인 경우) 재력과 인맥 지적능력이다. 사회적 기반이 확실하여 조력자나 돌봐줄 사람이 있고, 벌금을 낼 돈이 있거나, 교육수준이 높아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어) 적절한 사죄나 자기변호가 가능한 범죄자는 어지간히 큰 사건이 아닌 이상 실형을 피할 길이 있다.


이에 비해 결국 교도소로 가는 범죄자는 지식이 짧거나, 고령자, 이혼자, 주위에 연고가 없다는 등 사회적 기반이 약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교육수준이나 지능이 낮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반항적이거나 소통능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변상 및 합의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힘들고 부적절한 언동으로 오히려 나쁜 인상을 굳혀 실형을 선고받기 쉽다. 게다가 한 번 수감되면 조건은 더욱 악화되므로 출소 후에도 범죄를 반복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 하마이 고이치, "2円で刑務所、5億で執行猶予" (2엔으로 교도소, 5억 엔으로 집행유예) 중에서


무라카미류, 69

"그런데 이와세, 그만두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다마는 탄광촌 출신답게 착 가라앉은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아다마, 그건 아니야. 내 자신이 싫어졌을 뿐이야."

  나와 아다마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자신이 싫어졌다. 그것은 열일곱 살 소년이 여고생에게 사랑을 구걸할 때 이외에는 결코 입 밖에 내어서는 안될 대사다. 누구든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다. 경제력도 없고 아내도 없는 지방도시의 이름 없는 열일곱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선별되어 가축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귀로에 선 순간이므로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말해서는 안될 것을 말하면, 그후의 인생이 어두워질 뿐이다.

"겐이나 아다마와 함께 있으면, 왠지 내 머리가 좋아진듯한 느낌이 들어. 확실히 기분은 좋아. 하지만 무슨 일을 하건 나와는 사실 관계가 없잖아? 괜히 나까지 위대해진듯한 기분이 들어. 그러나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처량하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을 뿐이야."

  알았어, 하고 나는 말했다. 이와세의 말이 옳았고,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더이상 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와 아다마는 말없이 강변길을 걸었다. 이와세는 마음이 어두운 사람이었다. 어두운 인간은 타인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힘들다. 농담도 통하지 않는다.

파스칼, 팡세 99


    자애심과 인간적 자아(自我)의 본질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이 대상이 결함과 비참으로 가득 찬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는 위대하기를 원하지만 못난 자신을 본다. 그는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불행한 자신을 본다. 그는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불완전으로 가득 찬 자신을 본다. 그는 뭇 사람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결함이 그들의 혐오와 경멸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 이렇듯 궁지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의롭지 못하고 가장 죄악적인 정념이 태어난다. 왜냐하면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진실을 말살해 버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그 자체로써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진실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타인의 인식 가운데서 가능한 한 이것을 파괴한다. 다시 말해 자기의 결함을 타인에게나 자기에게나 숨기기게 온갖 주의를 기울이며 타인이 이 결함을 그에게 보여주거나 그들 자신이 보는 것을 참지 못한다.

    결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결함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더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환각이라는 불행을 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를 속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받기에 합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받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속이고 또 우리가 받기에 합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받고 싶어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렇듯 우리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불완전과 부덕만을 그들이 지적할 때 결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원인이 그들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를 이롭게 하고 있다. 이 불완전을 모르는 불행에서 우리를 건져주는 데 기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우리의 결함을 알고 또 우리를 경멸한다고 해서 우리는 화를 내서는 안된다.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인식하고 또 우리가 경멸받을 만할 때 우리를 경멸하는 것은 정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공정성과 정의로 가득한 마음에서 응당 태어날 감정이다. 그렇다면 전혀 반대되는 경향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발견할 때 우리는 뭐라 말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진실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혐오하고, 우리에게 유리하게 그들이 기만당하기를 바라고, 또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우리보다 더 높이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말이다.

......

    진실에 대한 혐오에는 갖가지 정도가 있다 그러나 이 혐오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은 확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애심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을 책망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갖가지 우회적이고 부드러운 표현을 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릇된 조심성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결함을 축소시켜야 하고 이것을 변명하는 척 해야 하며 칭찬과 함께 사랑과 존경의 표시를 섞어야 한다. 이 모든 것으로도 이 약이 자애심에 쓰디쓴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자애심은 가능한 한 그 최소량을 취하되 항상 불쾌감을 가지며 또 왕왕 이 약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대해 남모를 원한을 품는다.

    사람들이 우리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이익을 얻게 될 때 우리에게 불쾌감을 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은 여기서 유래한다. 그들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를 대해 준다. 진실을 혐오하기에 진실을 덮어주고 아첨받기를 바라기에 아첨하며 속임당하기를 바라기에 속인다. 

    출세의 길을 여는 행운의 각 단계마다 우리를 진실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면 유리해지고 반감을 사면 불리해지는 그런 인물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것을 더욱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왕이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자기만은 이것을 모를 수도 있다.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듣는 사람에게 유익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는 해롭다. 미움을 사기 때문에. 그런데 왕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섬기는 왕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긴다. 따라서 자기를 해치면서까지 왕의 이익을 도모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이런 불행은 분명히 신분이 높을수록 더 크고 더 일반적이다. 그러나 신분이 낮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항상 이익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은 영원한 환각일 뿐이다. 서로를 속이고 피차 아첨하기만 한다. 우리에 대해 우리의 면전에서 마치 우리가 없을 때처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사이의 결합이란 오직 이 상호 기만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만약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친구가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설사 그가 진실되게 사사로운 감정 없이 말하였다 해도 존속할 우정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 안에서나 타인에게나 위장이고 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그는 타인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해 주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기를 피한다. 정의와 이치에서 이토록 동떨어진 이 모든 성향들은 인간의 마음속에 천성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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